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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게시판 사가정의 봄
2016-04-15 16:18:56
임재수 <> 조회수 1340
121.183.105.22

사가정(일명 남곡리 정자)을 찾아 

활짝핀 복사꽃 벚꽃과 더불어

은자골에 잠시 머물고 있는

봄의 표정을 담아 올립니다.

사가정은 김석엽이란 분이 세웠다고 하는 정자로 용추폭포 위에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권태을씨가 지은 <사가정중건기>를 함께 올립니다.

  • 백두대간의 영산(靈山) 속리산이 동으로 그 맥을 뻗쳐 칠봉산(七峰山)을 짓고, 칠봉산이 성주봉(聖主峰, 聖祖峰)을 마주한 발치에 은자골을 놓아 남곡리 명추대(鳴湫臺)를 두었으니, 이 곳은 하늘이 갈무리한 상주 옛 고을 은척(銀尺)의 명구(名區)였다. 대(臺) 밑은 3층의 명연폭포(鳴淵瀑布)가 구슬 같은 물을 멀리 낙강(洛江)에 보내며 사람을 기다린 지 여러 천 년, 천 팔백 년을 전후하여서야 순천(順天) 김석엽(金錫燁, 1751~1817) 선생이 대(臺) 위에 사가정(四可亭)을 세웠으니, 자연은 사람을 만나 명승(名勝)에 인문(人文)을 더하였고, 사람은 자연을 만나 사덕(四德)에 순리(順理)를 더하였다. 사가(四可)란 『소학(小學)』 감주(紺珠)에서 취한 말로, “힘쓸 것은 행실(可勉者行)이요, 미덥게 할 것은 말(可信者言)이며, 맡길 것은 운명(可委者命)이요, 기억할 것은 하늘(可記者天)”이란 뜻이다. 네 가지 마땅히 지켜야 할 일로 좌우명을 삼았던 선생이 자연을 벗하여 수양하고 독서하던 자리요 후진을 양성하던 자리니, 사가정은 한 갓 산수경(山水景)만 즐기던 자리는 아니었다. 이 후 자손들이 선생의 뜻을 만들어 정자를 지켜 오더니 나라의 운이 막히어 외환(外患)의 암흑기(暗黑期)를 겪어야 했고, 내우(內憂)의 권란을 만나 미처 돌볼 여가가 없는 사이에 세월의 비바람조차도 비켜 가지를 않았다. 끝내는 붕괴 직전의 선조 유물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자손들이 뒷날을 기약하여 1980년에 철거하였으니, 유서 깊은 땅을 주춧돌만이 지킨 지도 20여 년이나 되었다. 때마침 상주시가 성주봉 자연휴양림을 조성하고 산촌(山村) 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함에 김동원(金東源) 주손(:1孫) 및 희연(熹淵) 보(甫)를 비롯한 본손들의 열원(熱願)과 덕산(德山) 주민추진위원회 성익환(成益煥) 위원장의 적극적 후원에 힘입어 총 공사비 팔천 여만원을 들여서 2001년 3월 26일 착공, 동년 9월 27일 옛터에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하였다. 정자(亭子)가 앉은 이 길은 상주(上州)시대 고기(古基)로 통하던 길이요,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며 국난에는 호국의 의병열사들이 황령사로 모이던 충의 길이며, 오늘은 하늘과 땅의 큰 기운을 받으며 성주봉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게다가 정자에 오르는 이는 분명 사가(四可)로 거울을 삼았던 조선(朝鮮) 선비와 만날 것이요, 북으로 칠봉산을 우러러는 백두(白頭)의 맥(脈)을 감지할 것이며, 남(南)으로 성조봉(聖祖峰)과 서(西)로 조운(趙子龍) 굴을 올려 보면서는 설화(說話)의 배경을 음미할 것이요, 동(東)으로는 동학교당과 은자산을 굽어보면서는 우리 정신을 생각할지니 새 천 년 첫 머리에 사가정을 중건한 일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겠다. 일을 마침에 그 전말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기문(記文)을 청한 이는 금중현(琴中絃) 보(甫)요, 사가정 중건을 도모하고 마무리한 이는 상주시 김근수(金瑾洙) 시장임을 특기한다.
    문학박사 안동 권태을(權泰乙) 짓고  청암(靑菴) 김시웅(金時雄) 쓰고 호제(湖濟) 경주 김봉기(金鳳基)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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