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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미리보기 전기 이야기
2015-08-21 17:17:07
임재수 <> 조회수 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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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에서 자취하던 김0완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공부하다 불을 켜놓고 잠자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뭐 그런 일이 저라고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유달리 심했고 그래서 주인댁 마나님은 속을 많이 끓여야 했습니다. 대면해서 말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저에게 대신 좀 전해 달라는 말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드디어 어느날 저녁 가벼운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직접 본 이야기는 아니고 아주머니께 들은 변명 겸 하소연이었습니다.

"어제 저녁 또 불을 켜 놓고 자는 것 같더라. 코고는 소리가 들려 살짝 문을 열어 봤다. 방바닥에 큰 댓자로 누워서 자더라.들어가서 불만 끄고 나오려고 했다. 나오다가 캄캄해서 웃목에 냄비인지 그릇인지를 발로 찼다. 그런데 0완이 학생은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자더라. 그러니 재수 학생이 보거든 다른 생각은 절대 없었다. 불꺼고 나오다가 한 실수라고 전해 줘"

뭐 이런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친구에게 말을 했는데 이친구는 정말 몰랐다고 합니다. 그만큼 잠이 많은 친구였습니다. 제 나이 열 여덟살 때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전등불 밑에서 처음 생활한 것은 열다섯 살 되던 해 가을, 상주읍 만산리 자취방에서였습니다. 사실 전기가 들어 오기는 했지만  그 때는 전등을 켜는 것 외에 다른 용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등을 켜는 것도 주인집 눈치를 무지하게 살펴야만 했습니다. 저녁에 조금 일찍 켜는 것도 그랬지만 불을 켜고 자는 것은 집주인에게 엄청 큰 일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불을 켜 둔채로 등교를 했더니 주인께서 문을 따고 들어가서 불을 껐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2~3년후  73~74년 쯤에는 주인댁 마루에서 텔레비젼도 보았고 전기 다리미도 빌려서 교복(주로 하복)을 다려 입기도 했습니다.

1976년 늦가을(초겨울?) 우리 마을 가리점에서도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1887년 3월 경복궁내 건청궁에 전등이 켜진지 거의 90년만의 일이었습니다.  전기 가설하는 것은 보았지만 전등을 켜 보지 못하고 저의 아버님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해 여름방학때 귀향을 하니 전기 설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추석날(전날?) 저녁이었습니다. 이웃마을 불무골(황령2리)에서 요란한 함성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불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그 때는 자존심이 팍 상했습니다.  우리 마을 보다 먼저 전기가 들어 오는 것이 참으로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사건의 내막이 밝혀졌습니다. 정식으로 점등을 한 것이 아니고 좀 아는체 하는 사람이 불법으로 전기를 건드렸던 모양입니다. 그 다음날부터 그 사람은 관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후문이었습니다.

전기가 들어 오기 전에는 호롱불을 사용했습니다. 어두운 것 말고도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꺼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성냥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방안에서 누에를 길렀습니다. 밤에도 불을 켜고 누에 밥(뽕잎)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때 어머니께서 곤히 잠든 집안 식구들을 모두 깨우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새벽인지 한밤중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시간에 불을 켜야 하는데 성냥을 못찾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 시절 단잠을 깨우면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릅니다. 밤잠 못자고 일하시는  어머님의 고달픈 처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탓인지도 모릅니다.

속담처럼 등잔 밑은 더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등잔 위에 얹힌 호롱을 내려 책 가까이 두고 읽고 쓰기를 많이 했습니다. 꾸벅꾸벅 졸다가 머리를 그슬린 적이 가끔 있었습니다. 어두워서 심지를 자꾸 올리다 보면 그을음 냄새인지 석유냄새가 방안에 가득 차기도 했습니다. 개구장이들이 모여서 놀다가 장난이 심해서 등잔과 호롱을 패대기쳐서 석유를 쏟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모여서 놀다가 막걸리도 한잔 했기에 목이 말랐습니다. 부엌에 가서 물 좀 떠 오너라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한 사람이 떠다 바쳤습니다. 벌컥벌컥 잘도 마셨습니다. 다 마시고 보니 구정물이었습니다. 떠 온 사람이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등불이 없었기에 일어난 소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절 석유는 배급제였습니다. 마을 이장님(반장님?)이 각 가정의 주문을 받아서 또 어디론가 주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기름이 나오는 날 동네 소임을 맡은 아저씨가 기름통(3통?)을 소 등에 싣고 돌아 오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각 가정에 분배를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보통 대병(1되)으로 받아 와서 사용했는데 두어달 정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봉창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방과 부엌(또는 마당)쪽으로 난 직경 1자 정도의 둥근(바닥은 평평함) 창이었습니다. 그 창은 바깥쪽(부엌) 에서 창호지로 바람만 막을 수 있게 발랐습니다. 그래서 밤에 부엌이나 봉당 쪽에서 일을 할 때 방안에서 호롱불을 봉창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그러면 밖이 어느 정도 밝아서 일하기가 쉬웠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초롱 속에 호롱을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사면에 판유리를 끼워서 빛이 잘 비치도록 되어 있었지만 깨어진 유리를 제때 구하지 못해 창호지를 바른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호야라고 하는 것도 있었지만 바람을 완격하게 차단할 수 없어서 불이 잘 꺼졌습니다.

소나무가 겉은 다 썩어도 속에 송진이 많은 부분은 썩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이것들을 적당한 굵기로 쪼개어 불을 붙이면 꺼지지 않고 기름처럼 오래 가면서도 잘 탑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까지"라고 불렀습니다. 가을날 밤 늦게까지 마당에서 타작을 하는 등 많은 사람이 밤에 일을 할 때는 소까지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여름날 밤에 소까지 불을 켜 들고 도랑에 가재 등의 민물고기를 잡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불치기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소까지 불을 든 친구가 웅덩이 물에 엎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불이 꺼지고 나니 너무 어두워 험한 산골 도랑에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이 뜰 때까지 앉아서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쯤 후래쉬(손전등)이라는 것을 봤습니다. 이 것으로 새집을 후고 다니는 것을 구경을 했습니다. 아마 늦가을(초겨울)으로 기억을 합니다. 초가지붕 처마 밑에 뚫린 새집으로 불을 비추어 참새가 있는 지 확인합니다. 새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사다리를 놓고 올라거서 손을 집어 넣어 참새를 잡아 냈습니다. 그 시절 한두번 본 기억 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희귀한 물건이었음에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 우리 동네 노인 한 분이 이 불 끌 줄을 몰라서 물에 담가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전기가 없었던 시절이니 당연히 냉장고가 없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음식물이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 많은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삶은 보리쌀(보리쌀은 미리 한 번 삶아서 생쌀과 섞어서 밥을 했음)은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서 부엌 한 쪽에 매달고 삼베 보자기로 덮어 바람이 잘 통하게 했습니다. 깊은 우물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김치통을 두레박처럼 매달아 우물 속에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그시절 방수되는 뚜껑이 있어서 물 속에다 담가 두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요즈음은 냉장고 세 대에다 농사용 고추건조기 한 대 컴퓨터 휴대 전화 등 전기가 없이는 잠시도 잘 수 없는 시대입니다. 아 참 세월이 빠릅니다.

*기름통 : 미군들 짚짜 뒤에 달고 다녔던 기름통이었다고 추측함

*봉창 : 사전적인 의미는 "창을 여닫지 못하게 창호지로 봉해 놓은 창"입니다. 제가 알았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호야 : 남포[램프, lamp]라고도 합니다.

*소까지 : 표준어는 [관솔]입니다.

*참새 : 요즘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멧새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